부제: ‘선진입’만 믿다가 가해자 되는 무신호 교차로의 법칙
1. 프롤로그: 비 오는 밤의 아수라장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 퇴근길의 K씨는 평소 다니던 사거리에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번개 탓인지 신호등이 모두 꺼져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차들이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 K씨는 ‘내가 먼저 머리를 디밀면 비켜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서서히 진입했습니다. 그 순간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택시가 K씨 차의 측면을 들이받았습니다.
K씨는 “신호등 고장으로 난 사고니 국가가 배상해야 하고, 내가 먼저 진입했으니 피해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보험사의 과실 도표와 법원의 판결은 K씨를 ‘가해자’로 지목했습니다. 도대체 왜 신호등이 꺼진 상황에서 먼저 들어간 차가 가해자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알던 상식과 법 사이에는 위험한 괴리가 존재합니다.
2. 도로교통법의 냉혹한 룰: ‘서열’이 존재한다
신호등이 꺼지거나 점멸 신호(황색/적색)로 운영되는 곳을 법적으로 ‘교통정리가 행하여지고 있지 않는 교차로’라고 부릅니다. 이곳은 무법지대가 아니라, 도로교통법 제26조에 따라 철저한 우선순위(서열)가 적용되는 곳입니다.
법조문에는 “이미 교차로에 들어가 있는 차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선진입은 ‘간발의 차이’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명확하게 먼저 진입해서 교차로를 거의 통과해가는 시점이어야 인정받습니다. 서로 비슷하게 진입해서 충돌했다면 선진입 주장은 대부분 기각됩니다.
폭이 넓은 도로에서 진입하는 차가 좁은 도로(소로)에서 나오는 차보다 우선권을 가집니다. 만약 내가 골목길에서 큰길로 나가다가 신호등 꺼진 교차로에서 사고가 났다면, 대로를 주행하던 차의 통행을 방해한 과실이 크게 잡힙니다.
도로 폭이 동일하고 동시에 진입했다면? ‘오른쪽 도로에서 진입하는 차’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운전석이 왼쪽에 있으니 우측 시야 확보가 더 쉽고 대응하기 빠르다는 이유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법적으로 우측 차가 왕입니다. K씨가 가해자가 된 이유도 바로 택시가 K씨의 ‘우측’에서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좌측 차는 양보 의무가 있습니다.)
직진하거나 우회전하려는 차가 좌회전하려는 차보다 우선입니다. 신호가 꺼졌다고 해서 무리하게 비보호 좌회전을 시도하다 직진 차와 부딪히면 좌회전 차의 과실이 훨씬 큽니다.
3. 국가 배상? “하늘의 별 따기”

“신호등 고장 안 났으면 사고 안 났을 텐데, 지자체가 물어내야죠!”
감정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법적으로 국가배상법(영조물 배상 책임)을 적용받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3.1. 면책의 논리: “불가항력”
법원은 “자연재해(낙뢰, 태풍)나 예측 불가능한 돌발 상황으로 신호등이 고장 난 직후에 사고가 발생했다면, 관리 주체가 즉시 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다만, 예외는 있습니다. ① 고장 신고가 접수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방치했거나, ② 수리 중임을 알리는 안전 조치(수신호 요원 배치, 라바콘 설치 등)를 하지 않은 경우에는 국가의 관리 소홀 책임(과실 20~30% 정도)을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운전자의 전방 주시 태만 과실이 상계되어 100% 보상은 불가능합니다.
4. [대처 가이드] 암흑 속 교차로 생존법
신호등이 꺼지는 순간, 그곳은 약속이 사라진 정글이 됩니다. 나를 지키는 것은 ‘법규 준수’와 ‘방어 운전’뿐입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신호가 없거나 적색 점멸 신호인 곳에서는 서행이 아니라 ‘바퀴가 완전히 멈추는 일시 정지’를 해야 합니다. 일단 멈추고 좌우를 살핀 뒤 출발해야, 사고가 나더라도 “나는 주의 의무를 다했다”는 강력한 면책 사유가 됩니다. 그냥 슥 지나가다 사고 나면 ‘신호 위반’에 준하는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앞차가 교차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면, 내 신호(가상의 우선권)라 하더라도 절대 진입하면 안 됩니다. 교차로 내에 갇히는 순간 사고 위험은 급증하고, 쌍방 과실 분쟁에서 매우 불리해집니다.
만약 경찰관이나 모범운전자가 수신호를 하고 있다면? 신호등 색깔이나 도로 표지판은 싹 무시하고 수신호를 최우선으로 따라야 합니다. 도로교통법상 사람(경찰)의 신호가 기계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5. 에필로그: 눈치 싸움 대신 ‘양보’가 답이다
“내가 먼저 갈 거야”라는 욕심이 신호등 없는 교차로를 지옥으로 만듭니다. 신호등이 꺼졌다는 것은 ‘시스템’이 멈췄다는 뜻이고, 이때 필요한 것은 운전자들의 ‘상호 배려’라는 백업 시스템입니다.
우측 차에게 양보하고, 대로 차에게 양보하고, 먼저 멈춰 서는 여유. 그것이 100 대 0의 과실 공방보다 훨씬 값진, 당신의 안전을 지키는 보험입니다.
[부록] 무신호 교차로 통행 우선순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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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순위: 이미 교차로에 진입하여 통행하고 있는 차 (명확한 선진입) - ✔
2순위: 통행 우선순위 도로(폭이 넓은 도로)에서 진입하는 차 - ✔
3순위: 우측 도로에서 진입하는 차 (동시 진입 시) - ✔
4순위: 직진 또는 우회전하려는 차 (좌회전 차보다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