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원인 불명’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핑퐁 게임, 그 사이에 낀 소비자
1. 프롤로그: 꺼지지 않는 불, 밝혀지지 않는 진실
“자고 일어났더니 차가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충전 중이던 전기차가 폭발하듯 화염에 휩싸이는 영상, 뉴스에서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열폭주(Thermal Runaway)’ 현상으로 순식간에 1,000도까지 치솟는 전기차 화재는 소방관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진압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차주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화재 진압 후에 시작되는 ‘책임 회피의 불’입니다.
차값의 40%를 차지하는 고가의 배터리. 화재가 나면 당연히 보상받을 줄 알았는데, 제조사는 “운전자 과실”이라 하고 보험사는 “제조사 결함”이라며 서로 보상을 거부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차는 탔는데 보상해 줄 사람은 없는 황당한 시츄에이션. 도대체 왜 전기차만 유독 이런 ‘책임 떠넘기기’가 심한 걸까요?
2. 왜 싸우는가? : ‘증거’가 사라지는 마법
2.1. 재만 남은 현장, 입증은 소비자의 몫?
내연기관차는 불이 나도 엔진룸의 발화 지점을 통해 누유나 합선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기차는 다릅니다. 배터리 셀 하나에서 시작된 불이 전체 팩을 태우며 증거까지 완벽하게 소각해 버립니다. 원인을 밝혀줄 블랙박스나 ECU(전자제어장치)까지 녹아내리기 일쑤죠. 국과수 감식 결과가 ‘원인 불명’으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입니다.
- 제조사의 논리 (“외부 충격이다”): “배터리 자체는 완벽하다. 당신이 운전하다가 과속방지턱을 세게 넘어서 배터리 하단에 충격이 갔을 것이다. 사용자 과실이니 무상 보증은 안 된다.”
- 보험사의 논리 (“제품 결함이다”): “주차 중에 가만히 있던 차에 불이 났는데 무슨 운전자 과실이냐? 이건 배터리 셀 불량이거나 BMS(배터리 관리 시스템) 오류다. 제조사가 물어내라. 우린 자차 처리 못 해준다(혹은 구상권을 청구하겠다).”
2.2. ‘회색 지대’에 갇힌 소비자
이 싸움이 길어지면 피해는 고스란히 차주에게 돌아옵니다. 보험 처리를 하자니 ‘할증 폭탄’이 무섭고, 제조사와 싸우자니 대기업을 상대로 기술적 결함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자차 보험으로 처리하고, 억울하게 보험료 인상을 감수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3. [현실 대처법] 불타는 책임 공방에서 살아남기
법제도가 정비되기 전까지는 내 재산을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기차 오너가 반드시 챙겨야 할 3가지 방어 수칙입니다.
화재 후 제조사가 “관리를 못했다”고 주장할 때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정기 점검 기록입니다.
- 정기 점검: 서비스센터를 방문할 때마다 배터리 전압 편차, 절연 저항 등 정밀 진단 결과를 문서로 요청해 보관하세요. “직전 점검 때 정상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면 제조사 책임론에 힘이 실립니다.
일반 자차 보험으로는 배터리 전액 보상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전기차 전용 특약을 반드시 확인하세요.
- 배터리 신품 가액 보상 특약: 사고로 배터리를 교체해야 할 때, 감가상각된 금액만 주는 게 아니라 새 배터리 가격 전액을 보상해 주는 특약입니다. (연 1~2만 원 수준으로 가성비가 높습니다.)
- 충전 중 사고 보상 특약: 충전 중에 발생한 화재나 폭발 사고를 보장해 줍니다.
제조사가 가장 많이 걸고넘어지는 것이 ‘하부 충격’입니다.
- 하부 확인: 과속방지턱을 긁거나 돌부리에 찍힌 기억이 있다면 즉시 센터에 가서 하부 패널 손상 여부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두세요.
- 블랙박스 전원: 주차 중에도 충격 감지가 되도록 설정하되, 화재 시 영상이 소실되지 않도록 클라우드 저장 기능이 있는 블랙박스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4. 에필로그: ‘입증 책임 전환’이 시급하다

“소비자가 배터리 결함을 증명하라.”
현재의 법 구조는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전문 지식이 없는 개인이 대기업의 기술적 결함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화재 원인이 불명확할 경우 제조사가 ‘결함이 없음’을 입증하도록 책임을 전환하는 법적 장치가 시급합니다.
전기차 시대는 이미 도래했습니다. 하지만 안전에 대한 책임마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에게 떠넘겨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록] 전기차 오너 필수 체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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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보험 확인: ‘배터리 신품 가액 보상’ 특약 가입 여부 체크 - ✔
정기 점검 기록: 서비스센터 방문 시 배터리 진단 리포트 출력 및 보관 - ✔
충전 습관: 급속보다는 완속 충전 권장 (배터리 부하 감소 및 BMS 안정화) - ✔
화재 대응: 소화기 비치 (전기차용 D급 소화기 권장이나 초기 진압용)